2023. 6. 30. 17:55ㆍKAIST
(다음의 글은 논리적 글쓰기 수업 진단 글쓰기 과제였습니다. 정리도 할겸 올려보았습니다.)
미세먼지 농도가 999로 표시될 때 밖에 나가는 것은 썩 유쾌한 일은 아니다. 그것도 마스크가 없을 때는. 사실 숙소를 나와 버스를 기다리면서도 딱히 이상한 점은 못 느꼈다. “음, 하늘이 좀 뿌옇네” 정도? 버스에서 내려 목적지인 태산에 가서야 문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그날은 눈이 와서 등산이 금지되었는데, 멀리서 바라본 태산은 흰 눈이 쌓인 백색이 아니라 거무죽죽한 회색이었다. 회색….
처음부터 중국으로 여행을 올 생각은 아니었다. 17년 여름, 우리 4명은 6개월 뒤에 출발하는 항공권을 특가 세일하는 항공사 홈페이지에 앉아 있었다. 목표는 하노이였다. “아무래도 1월의 한국보다는 더 따뜻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대학교 1학년의 안일한 클릭 속도는 다년간의 테크닉으로 단련된 다른 여행 고인물들의 매크로를 이겨내지 못했고, 결국 특가 항공권을 모두 빼앗길 수는 없다는 마음에 남는 여행지를 아무데나 누를 수밖에 없었다.
“야 근데 칭따오가 어디냐?”
“그거 아님? 맥주?”
“그런가? 그냥 아무데나 가~”
의식의 흐름 속에서 결정된 목적지 속에 우리는 결국 2018년 1월 25일 칭따오에 도착했다. 참고로 1월의 칭따오는 서울보다 평균 기온이 약 3도 더 낮았다. 우리의 계획은 칭따오에서 관광 이틀, 공자 묘가 있는 취푸에서 하루, 태산이 있는 타이안에서 하루, 다시 칭따오로 돌아와서 하루를 보내고 다시 오는, 빡빡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널널하지도 않은 그런 계획이었다.
처음 이틀은 괜찮았다. 하루에 지하철역 10개 정도 거리를 걸어다니고, 체감온도 영하 20도의 바닷바람을 맞아가며 돌아다녔지만 처음 먹어본 베이징 덕은 맛있었으며, 34층 아파트에서 본 전망은 꽤 괜찮았다. 무엇보다도 높은 곳에서 바라본 주택가가 예뻤다. 독일의 조차지였던 칭따오는 질 좋은 맥주뿐만 아니라 예쁜 유럽식 건축양식도 물려 받았는데, 전망을 바라보고 있으면 마치 유럽 어느 도시에 온 것만 같았다.
둘째 날 오후에 취푸로 가기위해 칭따오역에서 가오티에(중국 고속철도)를 탔는데, 취푸역에 도착하니 밤 10시였다. 예약한 게스트 하우스 주소를 택시 아저씨에게 보여주고 가달라고 했는데, 차창 너머로 보이는 풍경이 이상했다. 중국은 도로와 건물이 일단 크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크다. 왕복 12차선은 되어보이는 길에, 약간 섬뜻한 기분이 드는 선홍색의 가로등(그나마도 두개 중에 하나는 꺼져있다), 게다가 그 큰 대로에 차가 우리 밖에 없었다. 대로에서 나와 가로등보다 차 라이트에 더 의존해야 하는 그런 후미진 길에 들어섰을 때는 “내 장기는 과연 어디로 가게될까? 여러 곳으로 흩어지는 것보다는 한사람한테 가는 게 낫겠지?”나 “아… 이렇게 가는건가? 아직 못 해본 게 많은 것 같은데…”라는 생각이 들며 짧은 삶을 잠깐이나마 되돌아보았다. 하지만 아저씨는 우리를 무사히 목적지에 데려다주셨고, 110(중국의 112)를 입력해 놓고 통화버튼에 손가락을 가져다 놓았던 친구를 놀리며 체크인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곳은 중국, 숙소마저도 험난했다. 영하 15도에 난방이 안되는 방은 생존의 투쟁이 벌어지는 곳이라는 걸 나는 직접 체험할 수 있었다. 유일한 난방기인 천장형 온풍기는 가동한지 30분만에 미약한 온풍을 뱉어냈고, 그동안 우리는 창문 틈새를 휴지로 메우고 뚜껑을 열어놓은 상태로 커피포트를 가동시키는 등의 기행을 벌여야 했다.
셋째 날 아침, 우리가 온 취푸에는 공자를 모시는 사당인 공묘, 공자의 자손이 대대로 사는 공부, 공자와 그 자손들의 무덤인 공림이 있다. 문화적 가치가 높은 유적지들이지만, 인당 30000원은 중국치고 너무 비싼 것 같았다. 하지만 구글에서 찾아본 바로는 논어 구절 5개를 중국어로 암송할 수 있으면 공짜라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5개 가장 짧은 구절을 골라 어딘가 고장난 중국어로 달달 외우며 시험장소에 도착했다. 신청서를 내고 시험관 앞에 앉아 5개를 다 암송한 후 뿌듯한 표정으로 시험관을 보고 있으니 아직 4개 밖에 안했다는 것 아닌가? 그렇다. 사실은 3번째와 4번째 구절이 다른 구절인 줄 알았지만 이어지는 구절이었던 것이다. 급하게 짱구를 굴려, 시험관 앞에선 고뇌하는 것 마냥 고개를 360도로 돌리며 음… 어…라며 생각하는 척을 하고 책상 밑에선 스마트폰으로 다른 구절을 찾아 떠듬댔다. 감독관의 한심한 표정과 함께 입장권을 얻을 수는 있었지만, 시험장에 들어갈 때 “’곤니치와~’라고 하면서 들어갈 걸 그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취푸 관광을 마치고 타이안으로 가기 위해 취푸역에 갔다. 처음 본 숫자는 60분 연착.
“흠… 뭐 이런게 여행의 맛이지!”
30분 후엔 숫자가 120분 연착으로 바뀌어 있었다.
“와, 우리나라였으면 항의하고 난리났을텐데 그치? 밥이나 먹고 오자”
밥을 먹고오니 262분 연착으로 변경되어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4시간 22분 더 걸려 도착한 타이안역에서는 숙소까지 바가지를 3배쓴 택시를 타는 수밖에 없었지만,(처음엔 바가지 쓰는게 너무 자존심이 상해서 3시간 반거리를 걸어가려고 했다.) 한국에선 상상도 못한 5성급 호텔이 힘겨운 여정에 지친 우리를 반겨주었다. 우선 룸서비스로 허기진 배를 채우고, 앞에 있는 편의점에 가서 처음보는 먹을거리들을 잔뜩 사와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다음날 태산 등반을 위해 호텔에서 나온 뒤, 미세먼지 농도가 측정불가라서 999로 밖에 표시가 안된다는 걸 깨달은 건 맨 처음에 썼던 것처럼 태산에 도착하고 나서였다. 그제서야 현지인들조차 모두 마스크를 쓰고 있다는 걸 깨달았지만 뭐… 어쨌든 그날 일정이 태산 등반 하나였기 때문에 할 게 없어진 우리들은 기차역에 미리 가있기로 결정했다. 기차역에 들어서는 순간 전광판에 우리가 탈 기차번호가 적혀있었다.
결.항. 두 글자와 함께.
눈이 와서 기차가 결항된 것이다. “뭐 한 3cm도 안온 것 같은데 왜 결항이지?” 라고 했더니 우리가 탈 기차가 상해에서 올라오는데, 남쪽은 원래 눈이 안오는 지역이라 눈에 대한 대비가 안돼있어서 그렇단다. “뭔놈의 나라가 이모양이야!”라고 외치고 싶었지만, 여행 내내 느낀 중국이라는 나라에 대한 분노는 급하게 잡은 숙소에서 KFC 햄버거를 한입 베어먹으며 터졌다. 향신료를 못 먹는 나는 중국에 와서 먹는 모든 음식마다 고수 아니면 마라라는 죽음의 순환에서 고통받고 있었다. 그래서 “프랜차이즈 햄버거는 안전하겠지?”라고 생각했지만, 누가 알았으랴, 중국인들은 치킨버거 패티 속에도 마라를 넣어먹는다는 사실을… KFC 치킨버거에 마라를 넣어먹는 중국인들의 식성이 더 나쁜지, 눈 3cm왔다고 고속철이 결항하는 꼬라지가 더 나쁜지 토론하며 우리의 밤은 깊어갔다.
다음날 꼭두새벽에 일어난 우리는 다행히 칭따오로 돌아가는 고속철을 예매할 수 있었다. 돌아와서는 간단히 칭따오 맥주공장을 보고, 그 다음날 바로 한국으로 돌아왔다.
우리는 인천공항 입국장에서 다짐했다. “내 인생의 중국여행은 이제 끝이다!”
하지만 거짓말처럼 나는 6개월 뒤 다시 중국에 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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