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아그네스

제목에 ‘신의’라는 말이 들어가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연극은 종교를 배경으로 한 연극이다. 대략적인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몬트리얼 교회에 딸려있는 작은 수녀원의 젊은 수녀 아그네스는 자신이 낳은 아기를 죽여 휴지통에 버린 혐의를 받게 된다. 법원은 사건 조사를 위해 정신과 의사 마샤 리빙스턴을 수도원으로 보낸다. 루스 수녀원장은 아그네스의 수태를 신의 손길에 의한 것으로 믿고 있는데, 납득할만한 입증이 있지 않으면 아그네스는 정신병원이나 형무소에 보내지게 될 상황에 놓인다. 마샤는 너무도 순수한 영혼의 아그네스를 만나 대화하고 조사하는 과정에서 가슴아픈 진실들을 만나게 되는데…- from google
세 수녀의 이야기라니, 딱히 기대를 하고 보지는 않았다. 하지만 배우들의 열연과 더불어 연극 자체의 완성도가 나를 두 시간 동안 몰입하게 만들었다.
아그네스는 자신이 입은 순백색의 수녀복처럼 순수하다. 배우의 미성 덕분인지는 모르겠지만 “몰라요”를 외칠 때의 모습은 너무나도 아름다우며 감싸주고 싶은 동정심을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백색이 다른 모든 색에 대한 배타성과 거부를 통해서만 그 빛깔을 낼 수 있듯이 아그네스 역시도 자신에게 가해진 학대와 폭력을 주님에 대한 신실함으로 덮은 상태이기 때문에 하얀색을 유지할 수 있다. 결국 후반부에 피로 드러나는 순수의 상실이 수녀복에 칠해진 순간 그녀는 이미 살 수 없게 운명지어진다. 그녀는 순수, 정결, 신실을 한데 묶어 이것이 삶의 목적이라 할 수 있는 주와 자신을 이어주는 끈이라고 생각했다. 이 끈은 너무나도 가늘고 얇아서 실오라기 하나만의 해어짐도 허용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아그네스는 자신이 방금 낳은, 말 그대로 핏덩이인 자신의 아기를 죽일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자신의 부정직을 증명하는 살아 움직이는 존재를.
아그네스는 왜 죽음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는가에 대해 생각해보자. 극 후반부 리빙스턴이 행한 최면요법을 통해 아그네스는 수태가 행해진 날을 재연한다. 초반에는 리빙스턴과 원장 수녀 모두 기억하기 싫은 그 날을 떠올리는 아그네스를 배려하며 나긋나긋하고 다정하게 그녀를 이끌어간다.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 즉 그녀가 방 안에 누군가 있었다고 말하는 순간 두 명 모두 아그네스를 다그치기 시작한다. “그니까 누가, 누가 그 방에 있었어!”를 소리치는 두 사람에게 아그네스는 “하나님! 하나님이야!”라고 토해낸다. 아그네스 입장에서는 누가 그 방에 있었어도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다. 그녀의 입장에서는 모든 것은 주의 뜻, 주의 섭리이므로. 곧이어 그녀는 하느님을 저주하고 증오하다가도 그에게 처벌받을 것을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이며 극도의 흥분상태에서 기절하고 만다. 자신에게 그러한 시련을 준 사람이 결국 자신이 사랑해 마지않았던 주 그 자체인 모순을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누군가는 말할 수 있다. 그러한 모순을 극복하고서라도 믿음을 잃지 않고 주를 따르는 것이 진정한 신앙이라고. 하지만 순수하고 가련한 영혼에게 견딜 수 없는 시련을 주고 그 고통을 보는 것이 주의 섭리라면 나는 그것을 버틸 수가 없다. 죄 없는 피를 흘린 예수의 죽음은 인류의 구원을 가져왔다. 그렇다면 죄 없이 죽은, 죽어야만 했던 아그네스는 무엇을 위해 죽어야 했는가? 이 또한 성스러운 제단에 올려질 또 하나의 정결한 어린 양일 뿐이었나? 그녀의 십자가는 그녀의 몫이 아니었는데.
무신론자였던 리빙스턴은 극 마지막에 이렇게 말한다.
“왜? 왜? 그녀는 어린 시절 학대와 상처를 받아야했고, 아이를 죽여야 했으며, 마음은 갈기갈기 찢겨져야 했나요? 하느님! 당신은 어떠한 분이십니까? 도대체 당신은 어떠한 하느님이시길래, 이렇게도 질서정연한 우주 속에서, 자기를 유린당하면서까지, 그러한 놀라운 체험을 해야만 하나요? 저는 이제 더 이상 무엇을 믿어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전 그녀가 축복 받으리라는 것을 믿고 싶습니다. 저는 정말 그녀가 보고 싶습니다. 그녀가 그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