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체른 - Lucerne (2023/02/10)
종강 후 하루 18시간씩 자는 굼벵이로 살다가 안되겠다 싶어 루체른을 다녀왔습니다.
사실 직전 날까지도 갈까 말까 고민을 많이 했었는데, 막상 직전 날에 기차 1일 day pass를 끊어놓으니 환불이 안되어서 강제로(?) 다녀오게 되었습니다.
로잔에서 6시 반 기차를 타고 루체른에 9시 쯤 내려 바로 여객선을 타러 이동했습니다.
루체른 역(bahnhof)와 루체른 선착장(bahnhofquai)가 바로 붙어 있어 횡단보도만 건너면 바로 기차에서 내려 여객선을 탈 수 있었습니다.
오늘의 일정은 Weggis 트래킹 -> 케이블 카 -> 산악 열차로 Rigi 산 등반 -> Lucerne 시내 탐방이어서 먼저 Hertenstein에서 내리기로 했습니다. 시간은 루체른에서 한 40분 정도 걸렸던 것 같아요.
Weggis(베기스)는 루체른 건너편에 있는 조그마한 도시인데, 풍경이 아름답고 관광객이 붐비지 않아서 좋았습니다. 사실 솔직히 말하면 조깅하는 아주머니나 산책하는 할아버지 몇 분을 빼면 사람이 거의 없더라구요. 아마 겨울이라 그런게 아닌가 싶습니다.
케이블카 시간이 남아서 30분 정도 호수멍을 때렸습니다.
저도 이런 집 주세요...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가면 나오는 Rigi Kaltbad-First 역에는 신기하게 온천이 있어요!
0도에 날씨에도 불구하고 모락모락 김이 올라오는 진짜 온천이 있어서 신기했답니다.
Rigi Kaltbad-First역에서 정상인 Rigi Kulm역으로는 산악열차를 타고 올라갑니다.
Rigi산의 산악열차는 1871년에 처음 개통된 유럽에서 제일 오래된 산악열차라고 합니다.
사실 올라가보면 식당이랑 카페 정도 밖에 없어요. 하지만 Rigi가 융프라우나 마터호른 같이 높은 산들과 다른 점은 해발고도가 낮아 밑에 있는 자연경관을 더 잘 볼 수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게다가 Rigi는 많은 호수들로 둘러 쌓여 있어서 산과 호수가 어우러진 풍경이 더 멋있는 것 같아요.
점심으로 싸간 바나나와 귤을 먹고 기차를 통해 Ligi Kulm -> Arth-Goldau -> Lucerne으로 돌아왔습니다. 거리는 멀지 않은데, 배차간격 등의 이유로 2시간이나 걸렸어요. Ligi 산 트래킹이나 스키, 눈썰매를 타실 분들은 참고해서 일찍 가셔야 할 것 같습니다.
내려와서는 루체른역 근처에 있는 카펠교에 갔습니다. 이것도 역시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다리라고 하네요. 하지만 90년대에 누군가가 버린 담배꽁초에 의해 전소되어 지금 보이는 모습은 복원 후의 모습이라고 합니다.
사실 스위스에 와서 가장 놀란 것 중에 하나가 사람들이 흡연에 대해 정말 관대하다는 것이었는데요, 길거리나 옆에 누군가가 있는 것에 상관하지 않고 야외면 모두 담배를 필 수 있는 공간으로 간주되는 것 같았습니다. 횡단보도 신호를 기다리면 거의 두 번 중에 한 번은 누군가가 담배를 피고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이건 특히 프랑스어권 스위스와 프랑스 쪽이 그런 것 같고, 독일어권 스위스는 조금 덜 한 것 같습니다. 프랑스어권에서는 카뮈나 사르트르 같은 지식인들이 흡연을 하는 모습이나, 보들레르 같은 사람이 여성 해방의 상징으로써 흡연을 하는 모습 등이 널리 받아들여져 그런 게 아닐까 싶네요.
카펠교 왼편에 있는 예수교회에 들어가 봤습니다. 유럽을 여행하면서 성당을 하도 많이 돌아다니다 보니 이 정도는 뭐 평범한 느낌이 들었어요. 하나 특이한 점은 이 성당이 예수교에서 설립한 것이라는 점입니다. 제네바나 취리히의 경우 종교개혁의 여파로 가톨릭 성당이 거의 없어졌었는데, 루체른에는 남아있는 것이 신기했습니다.
다음으로 무제크 성벽(중세 성벽으로 망루에 오르면 루체른 시내가 한 눈에 보인다고 합니다.)를 가보았지만, 겨울에는 닫아 들어갈 수 없었어요ㅠㅠ
그래서 다음은 빈사의 사자상! 빈사의 사자상은 1792년 프랑스 혁명 당시 국왕 루이 16세와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를 지키다 사망한 스위스 용병 786명을 기리기 위한 조각이에요. 지금과 달리 스위스는 산악지대의 특성상 농사가 힘들어 18세기까지만 해도 용병업이 나라의 주 산업이었는데요, 고용주에 대한 충절과 용맹함으로 유명했습니다. 1792년 튈르리 궁의 습격 당시에도 엄청난 규모의 분노한 민중이 몰려오자 궁전을 지키던 프랑스군 근위대도 도망가는 와중에 스위스 용병대는 끝까지 궁전을 지키다 모두 사망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자 아래를 잘 보면 프랑스 부르봉 왕가의 상징인 백합 문양의 방패를 지키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어요.
근데 근처에 뭐 별게 없어서 한 5분이면 다 보고 나왔습니다.
사자상을 보고 호수쪽으로 나왔는데, 날씨가 좋아서인지 도시의 모든 사람들이 다 여기 있는 것 같았어요. 저도 기차시간이 남아 근처 카페에서 커피를 들고 벤치에 앉아 가만히 호수를 지켜봤습니다. 커피를 들고 앉을 곳을 찾다 한 쪽 끝에 할아버지가 저랑 비슷한 컵을 들고 홀짝이시는 벤치 반대편 끝에 앉았습니다. 그리고 말 없이 계속 앉아있었어요. 제가 홀짝하고 한입 들이키면 옆의 할아버지도 홀짝. 제가 오른쪽에 갈매기를 보다 왼쪽에 산을 보면 할아버지도 저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뭔가 30분 동안 무언의 유대를 쌓은 기분이었습니다. 나는 이 도시의 완전한 이방인으로 경치를 감상하며, 할아버지는 하루를 마치고 마시는 차 한잔의 여유를 나누며 각자 처한 상황은 다르지만 호수를 완전히 받아들이고 감상하고 있다는 기분을 공유할 수 있어 행복했습니다. 흐뭇한 기분으로 기차시간이 되어 일어나면서 할아버지 쪽을 슬쩍 봤는데, 아뿔싸 할아버지가 들고 있던 것은 커피나 차가 아니라 맥주캔이었던 것이에요. 무언가 배신당한 기분이었지만, 커피감성과 맥주감성의 차이는 무엇일까를 곰곰히 생각하며 마저 호숫가를 걸었습니다.
스위스 살면서 느낀건데, 정말 저는 호수를 좋아하는 것 같아요. 전에는 바다를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바다보다 호수가 더 좋아. 바다는 물이 밀려오면서 동적인 움직임이 전해지지만 수평선을 보면 무한과 의미없음이 마구 밀려오는데, 호수는 움직임이 있어 지루하지 않으면서도 산이 시선의 끝을 꽉 잡아줘서 정신줄을 놓지 않게 해주는 것 같아요. 게다가 결정적인 점, 맑은 호수는 바닷 비린내가 안나요. 너무 좋아. 우리나라도 이런 호수 있었으면 좋겠다. 석촌호수는 너무 작고 사람이 많아 번잡하고, 산정호수는 무슨 유원지처럼 해놓아서 물멍이 안돼요. 돈 많이 벌어서 루체른에 집 한 채 사야지.
그렇게 해서 5시 기차를 타고 로잔으로 돌아오니 7시 반!
오랜만에 즐거운 하루였습니다.